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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언주 - 기린과 사람

허연소 2008. 2. 23. 11:47

 



김언주_편지(a letter)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7

 

김언주의 ‘기린과 사람’ ● 김언주씨는 기린과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문식으로 조근조근 ‘이미지 보따리’를 펼쳐 감상자의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작업은 일종의 우화(寓話)로 분류할 수 있다. 사전을 뒤져보니 우화란 “인간 이외의 동물 또는 식물에 인간의 생활감정을 부여하여 사람과 꼭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빚는 유머 속에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는 설화(說話)”라고 설명한다. 김언주씨의 그림은 인격이 없는 기린을 사람과 동격으로 설정한 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괴리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키 작은 인간과 멀 대처럼 키가 웃자란 기린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서로 등을 진 걸로 미루어 관계가 서먹서먹하거나 무슨 다툼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 중심에는 두개의 틀니가 서로를 향하고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어찌나 입을 크게 벌리고 상대방을 비난하는지 치아에서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알지 못한다. 별 것 아닌 문제를 놓고 다툴 때의 우리 모습과 흡사하다.




김언주_침묵(silence)_캔버스에 유채_60.5×50cm_2007


옛날부터 동물을 이용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하는 방법은 적지 않지만 그런 경우 주인공인 동물들은 인간의 능력과 줄을 긋고 절대로 자기 본래의 영역을 넘지 못하는 데 비해 우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의 모든 기능을 구비한 인격으로서 형용되어 등장한다. ?이솝우화?가 대표적인 예로 간결하고 소박한 동물우화로 인간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 바 있다. 프랑스의 라 퐁텡(La Fontaine)은 17세기 왕족들의 호화판 생활과 딴 판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암울한 삶을 세련된 기지와 유머로 묘출하였다.




김언주_함박눈(snowing happily)_캔버스에 유채_72.5×60.5cm_2007


줄거리를 서술로 풀어가는 문학에 비해 사건을 한 화면에 담아내야 하는 시각예술의 특성상 그림은 스토리텔링과 플롯구조가 취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화’가 미술의 한 형태로 자리잡는 난점으로 작용해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생소한 우화를 미술안에 끌어들였다는 점에 김언주씨의 그림의 특징이 있다. 김언주씨의 그림은 사람과 기린이 엮어내는 사건에 기초하여 현대인의 삶을 대리적으로 표현하고 혹은 작가 자신의 일상을 전달한다. 그림에서 기린은 사람과 꽤 친한 사이다. 둘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 예쁜 옷을 입고 등산을 하기도 하고 동물원에 놀러가기도 하며 야심한 밤에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노을이 진 해변 또는 스크린 앞에 앉아 다정하게 영화를 관람하기도 한다.




김언주_회상(retrospection)_캔버스에 유채_101×76cm_2007


그러다가 어쩐 일인지 둘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진다. 마스크를 쓰고 먼 산 쳐다보듯 딴 데를 쳐다보고 있는가 하며, 서로 떨어져 헤어지기도 하고 기린에서 달아나는 모습을 형용하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상호이해의 부족을 드러낸 것같다. 외로움과 고독의 수렁에 빠져 있으면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핵(核)인간’을 풍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모두 세태를 풍자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자아를 우화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붉은 사막에 누어있는 형상은 유학시절 애리조나와 유타 지방을 여행하면서 광활한 벌판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회상한 것이며 어둔 밤에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녹턴 작품도 그때의 미국시절을 회상한 작품으로 자아를 동물 캐릭터로 묘출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어린 아이처럼 눈오는 날을 고대하며 즐거워하는 순간, 선글라스를 쓰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시절을 즐겁게 묘사한 것도 있다.




김언주_향수(nostalgia)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07


김언주씨의 작품은 묘사나 형태 중심의 그림은 아니다. 인물은 단순하게 요약되어 있고 실물을 따라가기보다 ‘이야기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화면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면으로 구획하여 채색하는가 하면 유머러스한 캐릭터에 맞게 명랑한 색, 채도높은 색을 구사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에밀졸라(Emile Zola)의 소설 ?목로주점?에 나오는 주인공 제르베즈가 떠올랐다. 어렵사리 마련한 세탁소도 날려버리고 나락의 길로 들어선 제르베즈, 딸은 가출하고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렸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은 넘는다. 희망을 놔버린 제르베즈도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인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비참하고 슬픈 생을 마감한다.




김언주_blue night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07


김언주씨의 작품은 제르베즈처럼 생을 무책임하게 ‘비관’에 내맡기지 않는다. 흔들리는 전등의 위태로운 불빛 아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전등을 똑바로 매달아놓고 그 밑에서 대책을 짜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용기를 지닌 사람은 고난과 시련이 왔을때 풀썩 주저앉는 사람이 아니라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언주씨의 작품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희망’이 좌절을 막아주는 유일한 생의 무기라는 것을 알려준다. 전등이 흔들리고 나무의자가 삐걱거릴 때마다 동요하는 대신 감사할 거리를 찾고 재기의 의지로 일어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만일 김언주씨의 작품이 값싼 즐거움만을 추구했더라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시련과 고난을 딛고 얻은 희망일 때에라야 더 값진 법이다. 값싼 즐거움과 희망의 차이점은 ‘좌절이라는 걸림돌’을 뛰어넘었느냐 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좌절을 딛고 희망으로 가는 것은 감명을 주지만 막연한 즐거움의 추구는 자칫 더 큰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김언주_침묵III(silence III)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07


김언주씨의 작품은 절망과 희망중에 희망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무게중심이 실려 있다. 물론 무력감에 시달리고 섭섭한 감정을 품은 사람관계를 포착한 작품도 있지만 정작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고단한 삶중에서도 여유를 갖고 미소를 되찾는 일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행복의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실마리를 김언주씨는 언뜻 내비치는 듯하다. ■ 서성록

출처 : 작은나무의 블로그
글쓴이 : 작은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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