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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올, <35>콥트어와 기독교 ~ <40> 예수 생전에 예수를 초청한 에데사의 王

허연소 2008. 3. 18. 16:09

<35>초기기독교는 이집트에서 대세를 형성했다

콥트어와 기독교

도올 김용옥 | 제42호 | 20071230 입력
올드 카이로(Old Cairo) 콥틱박물관(Coptic Museum)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예수피난교회가 있다. 예수 가족이 사용했던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 우물 위에 이 교회가 건설되었다고 한다(작은 사진이 그 우물). 성화 속에는 예수를 목마 태운 요셉이 부인 마리아를 말에 태우고 3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멀리 보이는 카이로 지역을 지나가고 있다. 이 콥틱교회의 정식 명칭은 성 세르기우스교회(St. Sergius Church)이다. 매년 6월 1일이면 이곳에서 예수 가족 피난을 기념하는 특별한 미사가 열린다. [임진권 기자]
지금 우리는 아랍문명권과 이스라엘의 적대적 관계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단절된 별도의 두 문명으로서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집트가 아랍문명권의 한 맹주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시 이집트는 아랍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아랍 사람들이 이집트를 점령한 것은 7세기의 사건이었다.
639년에 파로스등대에 상륙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641년에는 카이로 외곽 지역에 신도시 푸스타트(Fustat)를 건설한다.
그러니까 639년 이전의 이집트 역사는 아랍과의 관련성이 전무하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를 오늘날의 대적적 감정의 색안경으로 들여다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기실 이스라엘의 역사 그 자체가 이집트 문명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과대포장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살기 이전의 족장들(Patriarchs)의 역사는 애매한 것이다.
그것은 구전을 통하여 내려온 단군설화와도 같은 문학이며, 어떠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단군신화의 기록이 몽고의 폭압에 유수되어 버린 고려 민중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출애굽’이라는 사건 자체도 바빌론유치시대(BC 587c.~537c.)의 폭압과 민족정체성 상실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더욱 강렬하고 선명하게 신화적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집트에 살던 어떤 소수민족 그룹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과정이 출애굽기라는 문학이 묘사하듯이 그토록 선명한 극적 과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몽(朱蒙)이 부여를 떠나 어별(魚鼈)의 도움을 얻어 엄호수(淹狐水)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우는 이야기보다 더 장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소수그룹의 민족 이동과정은 느슨한 시간의 점진적 과정일 수밖에 없다.

야훼신앙의 창시자이며 유대민족 역사의 진정한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모세도 이스라엘 사람이기 전에 이집트인이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서 이집트 말을 했으며 이집트 문명의 모든 훈도를 받은 이집트 왕족의 한 사람이었다.
출애굽이라는 문학적 사건의 상징적 이미지 때문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적대적인 관계로 파악하기 쉽지만 모세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끊임없는 교섭의 한 울타리 속에 있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족인 동시에 시내광야의 베두인이기도 했다. 여기 시내산 기슭에서 만난 이 베두인족 소년의 이름이 바로 ‘모세(Moses)’였다.
우리는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그릇된 단어 선택으로 인하여 이집트문명에 대한 오도된 인상을 가지기 쉽다.
범람은 천둥번개가 치는 홍수(flood)가 아니다.
그것은 태양빛이 찬란한 청천백일하의 정확히 예측 가능한 증수(增收, inundation)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나일강 주변의 광범한 농토에 관개와 개토의 역할을 해주는 천혜의 축복이었다.
이 범람의 축복 때문에 나일강 주변에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가뭄과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는 주변의 각박한 지역의 사람들은 무시로 이집트로 이주하게 마련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라 참으로 각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표현한 것은 나일강 주변의 풍요의 꿈을 팔레스타인에 투사한 것뿐이다.
따라서 이집트에는 옛날부터 유대인의 광범한 다이애스포라가 상존해 있었다.
아브라함과 야곱, 그리고 예레미야도 애굽으로 갔고, 바빌론유수에서 풀려난 사람들도 각박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보다는 풍요로운 이집트로 대이동했던 것이다.

마태복음설화에 의하면 예수도 태어나자마자 지금 카이로 지역에 와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것이다(마 2:13~23). 이러한 설화는 수많은 유대인이 뭔 일만 있으면 이집트로 피신하여 삶을 보전하였던 기나긴 실제 역사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뜻은 ‘기독교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규정짓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십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주류를 가장 적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된다.

최초의 기독교는 물론 유대인공동체의 한 운동이었다.
예루살렘성전멸망 이후, 그 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나일강 델타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나일강변의 유대인들은 물론 이집트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상당 부분 이집트 사람들과 동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들 중 지식인들은 대부분 히브리 말보다는 희랍어에 능통했다.
희랍어는 당시 로마세계에 있어서 가장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국제공용어였다.
기독교가 점차 이집트 토착민들에게 전파됨에 따라 이집트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풍요로운 희랍어 어휘들을 이집트 말 속으로 차용하면서 이집트 말 자체를 희랍어 문자로 표기하는 일종의 이두문자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이 이두문자를 콥틱(the Coptic language)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학계에서는 콥트(Copt)어라고 통용하고 있다. 이 콥트어는 희랍어로 표기되지만 어디까지나 이집트 말이다.
이 콥트어는 함족과 셈족의 혼합언어(Hamito-Semitic language)인 고대이집트어 발달사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언어이다.
콥트어는 이미 AD 1세기 때부터 서서히 발전해 나갔지만 이집트인들이 자신의 언어를 ‘콥트어’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애굽을 희랍어로는 ‘아이깁티오스(Aigyptios)’라고 불렀는데, 7세기 아랍 사람들이 애굽을 정복했을 때 애굽을 그냥 ‘쿠브트’(qubt)라고 부른 데서 기원한 것이다.
아이깁티오스→애굽부트→쿠브트→콥트로 와전되어 간 것이다.
그러니까 7세기에 이집트인들이 쓰던 언어를 아랍인들이 통칭해서 ‘이집트 말’이라고 규정한 단어가 곧 ‘콥트어’였다.
이집트 역사를 쓸 때에는 서로마제국의 통치가 종료된 395년부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641년까지를 공식적으로 콥틱시대(Coptic period)라고 부른다.
이 시기야말로 이집트의 기독교전성시기(Christian period)였으며 비잔틴시대(Byzantine period)에 해당한다.

앞서 우리가 논의한 안토니우스, 파코미우스, 아타나시우스, 이들 모두가 희랍어와 콥트어를 동시에 사용한 사람들이었다.
기독교를 잉태시킨 최초의 언어로서 우리는 희랍어와 콥트어를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최초의 조직적 운동은 모나스티시즘(monasticism) 즉 수도원제도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수도원제도 자체가 이집트 나일강변에서 발생한 것이다.
개별적 은둔생활인 앵코라이티시즘(anchoriticism)에서 집단적 규율생활인 세노비티즘(cenobitism)으로 발전해 나간 과정은 이미 앞서 상술하였다. 이들이 말하고 쓴 언어가 모두 콥트어였다.

이 공동규율수도승집단의 최초의 영적 리더가 파코미우스(Pachomius)였고, 파코미우스는 그의 저작을 콥트어로 남겼다고 사료되고 있다.
그의 저작은 전통적 이집트의 지혜문서와 연계선상에 있다. 그리고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운동을 더 엄격하고 더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셰누테(Shenoute, Shenute, or Schenoudi, AD 360c.~450c.)였다.
셰누테는 사소한 규율이라도 어기는 수도승에게는 채찍을 가할 정도로 엄격한 세노비티즘을 강조했는데, 셰누테야말로 콥트어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글을 남긴 대문호였다.
셰누테는 고도의 개념적 어휘들을 매우 주체적으로 구사하면서 콥트어의 스타일과 문법을 완성시켰다. 셰누테는 AD 431년에 에베소공의회(the Council of Ephesus)에 참석하여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이단으로 휘몬 장본인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제부터 공부하려는 도마복음서는 콥트어로 쓰여진 것이며, 이들 수도승들이 그들의 교과서로 가지고 있었던 바이블 텍스트였다.
 

36. 성서의 텍스트들은 어떻게 변형되었는가?

옥시린쿠스 사본

도올 김용옥 | 제43호 | 20080106 입력

룩소르 지역의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서는 최근까지 투탕카멘을 포함하여 63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신왕조(New Kingdom), 18왕조로부터 20왕조에 이르는 시기의 것이다.

이 왕들의 계곡의 준령을 넘어가면 거대한 바위절벽을 배경으로 한 핫셉수트의 장쾌한 신전이 펼쳐진다. 핫셉수트는 투트모시스 1세(Thutmosis Ⅰ, BC 1504~1492)의 딸이었는데 이복동생인 투트모시스 2세와 결혼하였으나 딸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따라서 비천한 첩에게서 난 투트모시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핫셉수트가 섭정했다(BC 1479). 임진권 기자

도마복음서는 콥트어로 쓰여졌다. 그러나 이 말은 보다 정교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수중에 주어진 완정한 도마복음 텍스트는 1945년 12월 나그함마디 엘카스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콥트어로 쓰여진 것이지만, 과연 도마복음서 자체가 최초에 콥트어로 저작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초기 콥트어 텍스트는 대부분 희랍어나 기타 다른 언어의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콥트어 도마복음서 이전의, 그 대본이 된 희랍어 도마복음서는 존재하지 않는가?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룩소르 쪽으로 약 200㎞를 올라가면 나일계곡과 사하라사막이 만나는 접점지역에 엘 바나사(El Bahnasa, Behnesa)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이 도시는 람세스 2세가 영화를 구가한 제19왕조의 한 행정구의 수도였던 고색창연한 옛 도시였는데, 옥시린쿠스(Oxyrhynchus, Oxyrynkhos)라고 불렸다.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탐험기금(Egypt Exploration Fund)의 도움을 받아 영국의 고고학자 그렌펠(Bernard P. Grenfell)과 헌트(Arthur S. Hunt)가 이끄는 탐사팀이 옥시린쿠스를 발굴했는데 엄청난 파피루스서류 쓰레기 더미가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현장을 목도하기에 이른다.
이 옥시린쿠스 파피루스는 BC 250년경부터 AD 700년경에 이르는 문서들로서 주로 희랍어와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이집트 디모틱문자, 콥트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아랍어로 쓰여진 것도 있다.
이 옥시린쿠스 파피루스의 발굴로 인하여 우리는 그레코-로만 세계의 일상생활을 규탐케 만드는 가장 풍요로운 일차자료를 획득하게 된 셈이다.
이 자료는 1983년에 이르러서야 50권의 책으로 영역되어 출간되었다. 3400여 개의 항목에 해제와 주석이 붙어 있다.

왕들의 계곡의 피라미드산(El Qurn)을 넘어오면 절벽 위에서 핫셉수트 신전이 내려다보인다. 관광객들은 이 무서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산길을 걸을 엄두도 내지 않는다. 참으로 어렵게 이 앵글에서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다시 한번 그 작열하는 열기를 느껴보고 싶다. 저기 멀리 보이는 강이 나일강이고 푸른 지대가 범람지역이다. 그 범람지역(코스모스)과 사막지역(카오스)의 경계선상에 피라미드나 신전이 지어졌다. 옥시린쿠스도 이런 접점에 있다.
이 옥시린쿠스 사본 속에서 오늘 우리가 정경으로 알고 있는 신약성서의 파편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마태복음, 로마서, 요한1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요한계시록 등등.
그러나 당시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예수 가라사대”의 형식을 담지하는 3개의 파편이 있었다.
이 파편들엔 POxy 1, 654, 655라고 번호가 매겨졌는데 당시 아무도 이것이 도마복음서의 희랍어 판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너무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그 총체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렌펠과 헌트는 이 3개의 파편을 그냥 ‘로기아 예수’(Logia Iesou, Sayings of Jesus)라고 분류해 두었다.

이 옥시린쿠스의 로기아가 빛을 보게 된 것은 물론 나그함마디의 도마복음서가 발견된 후의 사건이다. 옥시린쿠스 로기아 3편이 도마복음서의 희랍어 텍스트라는 것을 밝힌 사람은,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를 최초로 세상에 드러나게 만든 프랑스 대학원 학생 장 도레스(Jean Doresse)의 스승 앙리 샤를 퓌에슈(Henri-Charles Puech)였다.
에콜 드 프랑스의 종교사 교수였던 퓌에슈는 콥트어로 된 도마복음서의 완정한 모습을 보자마자 곧 옥시린쿠스의 로기아 파편과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양자를 대비한 결과 POxy (Papyrus Oxyrhynchus의 약호) 654는 도마복음서의 서론과 1~7번에 해당되고, POxy 1은 도마복음서의 26~29번, 30번, 77번, 31~33번에 해당되고, POxy 655는 도마복음서의 24번, 36~39번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따라서 옥시린쿠스 로기아 파편이야말로 도마복음서의 희랍어 판본의 존재를 더 말할 나위 없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콥트어 도마복음서는 옥시린쿠스 희랍어 도마복음서를 번역한 것일까?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다. 우선 옥시린쿠스 파편 자체가 제각기 다른 시대에 성립한 것이다. POxy 1은 AD 200년경의 것이며, POxy 654는 3세기, POxy 655는 3세기 중엽의 것으로 제각기 다른 전승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서물을 동시에 베낀 파편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희랍어 판본과 콥트어 판본을 비교해 보면, 구조적으로 양자의 공통점은 충분히 인지되지만, 콥트어 판본이 희랍어 판본을 직접 번역한 것으로 간주되기는 어렵다.
우선 우리는 이러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희랍어 판본 자체가 다양한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도마복음서는 초기기독교에서 인기가 높은 작품이었다.
콥트어 판본이 기초로 하고있는 희랍어 도마복음서와, 옥시린쿠스 파편이 기초로 하고 있는 희랍어 도마복음서는 제각기 다른 전승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콥트어 도마복음서에 관하여 다음의 7단계의 성립과정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제1단계: 도마복음서는 분명 “살아있는 예수(the living Jesus)”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살아있을 당대에 그가 한 말들은 추종자들에 의하여 기억되었고 구전으로 전파되었다.

제2단계: 어느 한 저자가 그 많은 구전 중에서 선별하여 단일한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이때 이미 선별과정에서 저자의 목적과 관점이 배제될 수는 없다.

제3단계: 이 한 저자의 탁월한 작품은 다양한 초기공동체의 사람들에 의하여 낭송되고 또 리터지(liturgy, 祭儀)로서 활용되었다. 따라서 많은 사경자들에 의한 다양한 사본이 성립할 수밖에 없다.

제4단계: 초기공동체가 점점 기독교화되어 가면서, 기독교공동체의 삶과 가치에 부합되는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지고 창작이 첨가되었을 것이다.

제5단계: 텍스트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희랍어서기관의 역할이다.
희랍어서기관은 희랍어 텍스트를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텍스트를 전사하는 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에 따라 약간의 가필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모든 사본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유례가 없다. 서기관들은 존경받는 ‘랍비’들이었다.

제6단계: 콥트어 번역자들에 의하여 희랍어 맥락이 콥트어 맥락으로 번역되는 과정에
서 또 한 차례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제7단계: 콥트어 사경자들에 의한 다양한 판본이 생겨난다. AD 4세기 후반에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27서 정경체제가 공표되면서 게벨 알 타리프의 사바크 더미 항아리 속으로 숨겨진 도마복음서는 바로 이 제7단계의 작품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누가 언제 도마복음서를 집필했는가?
 
 

<37> 예수에게 쌍둥이가 있었다?

디두모 유다 도마

도올 김용옥 | 제44호 | 20080113 입력

예수시대의 예수가 살던 집 같은 것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수 있을까?

갈릴리바다에서 북동쪽으로 헤르몬산이 바라보이는 골란고원 지역에 카즈린(Qazrin, Katsrin)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AD 746년에 지진이 나서 폭삭 무너져 긴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1982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예수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꼭 한 번 방문을 권하고 싶은 곳이다. 벽돌에 문패가 새겨져 있는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고 그 옆에 농기구 방이 있다. [임진권 기자]

고문헌의 세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텍스트를 누가 언제 썼느냐고 묻는 것은 좀 어리석은 질문이다. 『노자』를 누가 썼는가? 노자가 썼을까? 그렇다면 노자(老子, Lao Tzu)는 누구인가? 『논어』는 누가 썼을까? 안회(顔回)와 같은 직전제자가 썼을까? 안회는 공자보다도 일찍 죽었는데? 이런 질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질문자들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저자’의 개념을 고문헌에 대해 동일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를 영어로 ‘오서(author)’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오소리티(authority)’ 즉 ‘권위’라는 개념과 동근의 말이다. 독점적인 저작권이 특별한 권위를 갖는 근대사회에서만 저작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성의 개념은 고대문헌의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저작물을 어느 한 특정 개인이 소유한다는 발상 자체가 거부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저작이 종교적 목적을 송양(頌揚)키 위한 것일진대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자리에 어느 개인이 독점적 자리를 점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저자들이 사용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공인된 저명한 사도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었다.

콥트어 도마복음서의 마지막 페이지. 중간의 큰 글씨가 ‘퓨앙겔리온 프카타 토마스’.
마태복음을 과연 마태가 썼을까? 마태는 누구인가?
세무서에 앉아 있다가 예수를 따라나선 세리 마태(마 9:9, 10:3)인가?
그렇다면 똑같은 상황에서 예수를 따라나선 세리로 기록되고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Levi the son of Alphaeus)는 또 누구인가(막 2:14)?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태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마태복음을 마태가 썼다고 믿는 것은 신학계의 초보적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1세기 말엽 초대교회에는 마태라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 믿음에 따라 엑스라는 어느 저자가 그 이름을 빌렸을 뿐이다.
마가복음도, 누가복음도, 요한복음도 다 마찬가지다.
마가·누가·요한의 역사적 실체를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은 신학계의 정설이다.
이러한 사실이 복음서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근거 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를 ‘도마복음서’라고 부르는가? 도마가 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마복음서라는 책명은 후대에 편의상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경우는, 그 텍스트의 마지막에 책이름이 명료하게 부기되어 있다:
“퓨앙겔리온 프카타 토마스”(Peuaggelion Pkata Thomas: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
아마도 이 책명은 이 복음서를 전사한 희랍어 서기관이 첨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텍스트 자체가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디두모 유다 도마(Didymos Judas Thomas)가 기록한 것이라는 서론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음서는 최소한 형식상으로는 어떠한 상황에서 누가 기록한 것인지를 정확히 밝혀 놓고 있는 것이다.

우선 도마(Thomas)라는 인물은 공관복음서 속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12제자의 리스트 속에 맥락 없이 이름만 적혀 있을 뿐이며(마 10:3, 막 3:18, 눅 6:15, 행 1:13) 그 도마가 어떤 도마인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쌍둥이(디두모)라 불리는 도마”(Thomas, called the Twin)라는 명칭으로 명료하게 4번 나온다(요 11:16, 14:5, 20:24~29, 21:2). 그리고 4번 나오는 그의 이미지는 일관된 어떤 상(像)을 그리고 있다.
그 상은 후대 기독교역사에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심상의 물줄기를 형성했다.

첫 번째는 예수가 돌로 쳐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평소 사랑하던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살리러 가려 하자 제자들이 만류한다.
이때 도마만이 유독 외친다: “예수와 함께 죽으러 가자!”(11:16). 도마는 용기가 있고 신의가 있었으며, 자기 신상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인간이었다. 공자에게 충직한 자로(子路)와 같은 인간이었다.

두 번째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매우 감상적으로 자신의 최후를 예언하며 부활을 암시하는 추상적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
이때 아무도 반문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의 말을 알아들었을 리도 만무하다.
이때 오직 도마만이 외친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는 모르는디유.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단 말이유?”(14:5) 적시의 안타라 할 수 있다.
도마는 애매한 이야기들을 못 참는 것이다.
이 도마의 퉁명스러운 정직성에 대하여 예수는 그 유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 예수의 대답은 역시 또 추상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직한 도마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

세 번째는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가 사라진 후에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자,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외친다. 8일 후에 예수가 제자들 집회소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도마에게 이른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이 말 때문에 마치 도마를 ‘믿음 없는 자’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천박하게 성경을 읽는 자들이 말하지만, 도마는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실증주의자였으며, 거짓을 모르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회의를 통해서만이 예수는 진실한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고백은 모든 의심의 구름을 걷히게 만드는 찬란한 상식의 햇살이었다.

요한복음의 도마의 이미지는 이미 시대적으로 선행하였던 도마복음에서 왔다고 사료된다.
요한이 도마복음을 직접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간접적으로 그 이미지가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양자의 도마에 어떤 사상적 연관성이 충분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마는 과연 누구일까?

도마는 원래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이 쌍둥이를 희랍어로 표현한 것이 디두모(didymos)이다.
따라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는 표현은 ‘족발’이나 ‘역전앞’과도 같은 표현으로, 2개 국어의 의미를 중첩시킨 동어반복이다.
도마나 디두모나 쌍둥이임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일 뿐 그 이름(고유명사)은 아닌 것이다.
“디두모 유다 도마”에서 그 이름은 “유다”(Judas)이다. 가롯 유다가 아닌 쌍둥이 유다가 있는가?
복음서에서 유다는 예수의 형제로서만 언급된다(마 13:55, 막 6:3).

그렇다면 이 유다는 누구의 쌍둥이일까? 많은 성서학자들이(Koester) ‘쌍둥이 유다’(Judas the Twin)는 바로 예수의 쌍둥이라고 증언한다.
시리아전통의 도마행전(11장)에는 예수의 제자 도마는 예수의 쌍둥이였다고 확언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에게 쌍둥이가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동정녀 설화의 허무개그적 측면을 나타낸다. ‘쌍둥이 도마’의 전통은 동정녀 설화와 무관한 별도의 초대교회의 한 설화양식이었고, 도마복음의 저자는 그 이름을 빌려 예수의 친근한 모습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38> 도마복음서는 언제 집필되었나?

노자(老子)와 도마복음서

도올 김용옥 | 제45호 | 20080120 입력

마가복음 2장에 재미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며칠 뒤 예수께서는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다. 그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보냈다.”(막 2:1~4). 카즈린 마을의 가옥구조를 보면 이 장면이 실감나게 재현될 수 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옥상인데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내 앞에 거적이 덮인 곳이 있다. [임진권 기자]

야고보는 예수의 형이었고, 예수 사후 예루살렘교회를 주도해 나갔으며 27편 중의 하나인 야고보서의 저자라고 했다. 물론 야고보는 전통적 설대로 예수의 네 남동생 중 맏이일 수도 있다.
유다는 예수의 쌍둥이 동생으로, 도마복음서를 지었고, 또 정경에 편입된 유다서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유 1:1).
뿐만 아니라 인도 사람들은 예수의 쌍둥이 동생인 그 도마가 남인도에 와서 교회(Mar Thoma Church)를 개척했다고 믿고 있다.
도마를 초대교황으로 모시는 3000만을 넘는 방대한 기독교 인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요세, 시몬, 그리고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여동생들이 있었다(막 6:3, 마 13:55). 누가복음 설화에 의하면 세례 요한도 예수와 이종 간이다.
예수의 엄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엄마 마리아, 베다니의 마리아, 제베데의 부인 살로메, 그리고 그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하여튼 이 모든 사람이 예수 집안과 관련되어 있으며,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재임(齋任)과도 같은 후원자들이었다.

예수시대의 올리브기름 프레스기. 올리브를 볶아 동그란 삼태기에 넣고 나사를 지렛대로 돌려 짠다. 올리브기름은 식용도 되고, 약용도 되고, 등잔용도 되고, 정화 제식용도 된다. 예수시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생필품이었다. 올리브를 심으면 척박한 땅이 오히려 비옥해진다. 올리브의 확보는 부의 기준이었다.
초대교회사에 있어 예수 패밀리의 이름들은 추종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예수설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가족의 다양한 전승은 매력적 주제였다.

그러한 환상은 최근의 『다빈치 코드』에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도마복음서는 과연 언제 집필되었을까?
모든 학문적 활동은 기실 알고 보면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에 의해 지배당하는 측면이 있다.
도마복음서의 저성(著成) 연대를 운운케 되면 정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학자들은 당연히 현 4복음서보다 도마복음서가 먼저 성립했다는 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빠른 마가복음이 AD 70년경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도마복음서가 AD 70년보다 선행하는 작품이라는 설을 용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감정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은 도마복음서는 정경의 가치가 없는 외경이며, 빨갱이 같은 이단자들인 영지주의자들의 불경스러운 작품이며, 3·4세기경의 날조라고 치지도외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치지도외해 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미안하게도 도마복음서의 내용은 절반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현행 정경 복음서의 내용과 겹친다.
구체적으로 공관복음서와 도마복음서는 70개조 이상의 병행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서를 외경으로서 부인하는 것은 곧 공관복음서를 외경으로서 부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리고 만약 도마복음서를 영지주의 문서라고 간주하게 되면, 영지주의 그 자체를 정경 복음서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도마복음서의 내용은 현행 공관복음서의 내용과 사상적으로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조금도 이단적이거나 기독교의 권위를 훼손하는 불경스러운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기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나, 영지주의를 하나의 독립된 뚜렷한 실체로서 간주하는 오류를 불식시켰다. 영지주의는 실체화(reification)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고민을 안겨주는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대안이 ‘짜깁기설(a compositional theory)’을 주장하는 것이다.
짜깁기설이란, 도마복음서의 저자가 이미 공관복음서를 손에 들고 있었으며, 그것들에서 예수의 말씀을 여기저기 적출해내 도마라고 하는 캐릭터에 맞게 짜깁기해 놓은 책이 곧 도마복음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의 가능성도 전적으로 부정된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이 입증되려면 단일한 한 사람의 저자가 기존의 공관복음서를 자기의 이념에 맞게 선정, 개조, 변조해나간 어떤 체계가 입증되어야 할 텐데 이러한 입증은 현실적으로 엄청난 난관에 부딪힌다.

보통 우리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른다. 노자(老子)라는 『도덕경(道德經)』을 쓴 사상가가 있었고, 그 사상가의 질박하고도 오리지널한 생각을 장자(莊子)라는 사상가가 풍요롭게 발전시켜 『장자』라는 은유와 비유로 가득 찬 서물을 성립시켰다고 보기 때문에 노장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근세에 치엔무(錢穆)라는 대학자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활용하여 『노자』가 『장자』에 나타난 노자적 생각을 짜깁기하여 만든 것으로, 『장자』보다 후대에 성립한 서물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노장사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장노사상(莊老思想)’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유명한 저서가 『장노통변(莊老通辨)』이다.

그렇다면 『장자』 속에 인용되고 있는 노자 즉 노담(老聃)은 누구일까?
공자가 직접 찾아가 알현하였다는 노담, 혹은 노래자(老萊子)는 전설 중의 인물일 뿐, 현존하는 『도덕경』의 저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치엔무는 『도덕경』에 나오는 도(道)·명(名)·제(帝)·천(天)·지(地)·음양(陰陽)·덕(德)·일(一)·자연(自然)·후왕(侯王)·관장(官長)·기장(器長)·인주(人主) 등등의 개념이 전국(戰國) 말기의 개념일 수밖에 없으며, 『도덕경』의 성립연대는 전국 명가(名家)계열의 사상가인 공손룡(公孫龍)보다도 후대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치엔무의 주장은 마왕퇴(馬王堆) 노자 백서(帛書)의 발굴(1973), 곽점촌(郭店村) 노자 죽간(竹簡)의 발굴(1993)과 같은 놀라운 사건으로 빛을 잃고 말았다.
『도덕경』이라는 문헌이 우리의 통념보다 일찍 성립한 문헌이라는 사실이 물리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치엔무에게는 실증주의라고 하는 근대적 과학정신이 있었고, 중국이 복고사상에 묻혀 개명한 세계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통한(痛恨)이 있었다.
그래서 고대 서물의 실증적 하한선을 모두 내려잡았다. 이것을 의고풍(疑古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짜깁기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의고풍과 같은 건강한 시대정신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정통정경지존이라고 하는 보수적 통념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치엔무의 주장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 개념의 문헌학적 대비로 인하여 『도덕경』이라는 서물의 존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 설령 후대적 관념이 삽입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도마복음서를 후대의 짜깁기 날조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마복음서는 마가복음에 앞서 엄존한 것으로 그 프로토텍스트는 AD 50~AD 70년 사이에 성립한 것이다.
 

<39> 지혜담론이 먼저냐, 묵시담론이 먼저냐?

Q복음서의 저작연대

도올 김용옥 | 제46호 | 20080126 입력

베들레헴 웨스트 뱅크 지역을 감싸고 있는 분리장벽 앞을 내가 걷고 있다.

내 뒤로 장벽이 계속 연결된 모습이 보인다.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가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장벽 너머로 야곱의 부인 라헬의 무덤이 있다(창 35:19). 지금 이 시간에도 가자지구의 분리장벽 봉쇄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 분리장벽이야말로 유대교의 상징이요, 구약의 상징이다.

예수에게는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떠한 손실을 감내하더라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 포용정책을 쓰지 않는 한 중동문제는 해결될 길이 없다. [임진권 기자]

도마복음서의 발견이 신학계에 일으킨 가장 커다란 파문은 뭐니 뭐니 해도 Q복음서를 가설 아닌 실체로서 등장시킨 사건이다.
도마복음서는 1945년 12월 나일강 상류지역에서 어느 이집트 소년의 곡괭이질에 부딪혀 우연히 발견된 고문서이지만, Q복음서는 신학자들이 문헌비평의 방법을 통해 공관복음서 속에서 150년 동안 발굴해온 가설적 문헌이었다.
마태·누가복음서 중에서 복음서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가자료를 제외한 부분 중에서,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부분을 그냥 자료(Quelle)라는 의미로 Q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태와 누가가 한방에서 복음서를 같이 상의해 가면서 집필하지 않은 이상(물론 그런 가능성은 전무하다), 마태와 누가가 참고한 공통자료가 이미 문헌으로 성립해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그 가설적 문헌을 치밀하게 연구해본 결과, 그것은 단지 어록(로기온자료) 형식의 모음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즉 예수의 말씀(가라사대 파편)만으로 구성된 자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록자료인 Q를 자신있게 공관복음서 속의 또 하나의 복음서로서 제시할 수 있는 깡다구가 있는 신학자는 별로 없었다. 확고한 물증이 없는 데다 그 함의가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생애 드라마를 펼쳐주는 설화복음서(narrative gospel)의 모든 이야기들이 누락되어버리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 갈릴리 사역, 이적, 예루살렘 입성, 수난, 십자가 죽음, 부활 등등의 이야기가 예수라는 역사적 캐릭터의 이해와 무관한 사건들이 되어버리거나 부차적인 잡담으로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Q에 관한 논의는 철저히 신학이론 전문가들의 연구영역 속에서만 머물렀고, Q의 모습이 일반에게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도마복음서가 출현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성적 가설이 아닌 물리적 사실로서 우리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그 드러난 모습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114개의 로기온자료로만 구성된, Q에 대하여 1세기 반 동안 구상해왔던 바로 그 모습이었던 것이다.
도마복음서는 꿈에 그리던 어록복음서(sayings gospel)이었던 것이다.
이 어록복음서의 출현으로 Q는 단순한 자료가 아닌, 도마복음서와 똑같은 문헌양식을 지닌 또 하나의 어록복음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Q는 Q자료에서 Q복음서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그 연구가 확고한 물증적 기반 위에서 힘차게 진행되어 나갔다.
도마복음서가 여타 나그함마디 문서보다 빨리, 1959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미 1960년대부터 신학계의 가장 참신하고 중요한 이슈로서 도마복음서-Q복음서 연구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여러 가지 행태로 말미암아,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신학계의 관심을 독점하던 그러한 시절이었다.

길목에 이유 없이 억류되어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룬다.
Q복음서는 저성(著成)연대가 비교적 확실할 수밖에 없다.
최초의 설화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저성연대를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로 한 AD 70년경으로 잡는 데 신학자들의 이견이 없다.
따라서 Q복음서는 AD 70년 이전의 문헌임이 확실해진다.
Q복음서는 내용이 비교적 잡다한 갈래의 파편들이 복합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인간이 이 곤혹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밝혀주는 지혜의 말씀들이다.
이 메타노이아(생각의 전환)적인 지혜담론을 Q1이라고 한다면 Q1자료는 이미 AD 50년경에는 성립했다고 본다.
예수시대 때부터 이미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에 참여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을 수도 있고, 예수의 사후 그를 진정으로 사모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어느 시점에 희랍어로 문서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불트만은 그 오리지널한 문헌은 아람어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현대학자들은 그런 가능성을 제로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Q 속에는 예수가 당시의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며 그들을 비판하는 담론이나 또 하나님의 심판을 예시하는 담론이 들어 있다.
이러한 충돌담론·심판담론을 Q2라고 한다면 이것은 호교론적 냄새가 짙기 때문에 AD 60년 전후, 교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또 예수의 광야시험 장면과 같은 자기체험 고백이라든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규정하는 기독론적 냄새가 나는 파편들은 Q3에 속하는데 이것은 더 후대의 첨가로 보는 것이다.

고문헌은 어차피 이와 같이 한 시점의 저성(著成)을 말할 수 없고 시간을 두고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과연 Q복음서가 상기의 단계로 확연하게 구분되는지는 참으로 말하기 어렵다.

Q복음서의 저성연대에 의해 역으로 도마복음서의 저성연대도 확실해진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도마복음서의 프로토텍스트(proto-text)의 성립연대를 AD 50~70년이라고 확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같이 고려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다.
도마복음서는 Q복음서보다도 그 성격이 전일하다. 즉 지혜담론이 거의 전부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종말론적 암시가 전혀 없는 것이다.
종말론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은 또다시 논란의 대상이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말론 하면 곧바로 이 세계의 파멸, 시간의 종언을 의미하는 묵시론적 사태로서 이해한다. 그러한 묵시론적 이해는 로마의 박해 속에서 순교로 쓰러져가던 초기 기독교회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모든 종말론적 로기온은 연대가 후대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에는 그러한 종말론적 로기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예수는 천국을 선포한 사람이며 역사적 예수의 모습 속에 이미 종말론적 관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순수한 지혜담론은 묵시담론의 열기가 식어가는 어느 시기에 한가롭게 구성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묵시담론이 선행하는 것일까? 지혜담론이 선행하는 것일까?
Q복음서의 연구는 원시기독교의 진행순서가 지혜담론에서 묵시담론으로 발전했다고 확정짓는다.
그 역방향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마복음서의 연대를 후대로 내려잡으려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그것이 영지주의 문서라는 황당한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이제 본문에 즉(卽)해서 논의되어야 한다.
나는 도마복음서의 이해로부터 지혜담론이 설화복음서의 다양한 문학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간 그 루트를 추적할 수 있다고 믿는다.

 

 

<40> 예수 생전에 예수를 초청한 에데사의 王

도마기독교

도올 김용옥 | 제47호 | 20080203 입력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접경지에 있는 이 지중해 해변도시는 헤롯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에 의하여 유대왕으로 책봉되자, 이에 감읍하여 이 도시를 지어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했기 때문에 카이사레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BC 22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찬란한 도시는 예수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가 예루살렘보다도 훨씬 더 당대 문명의 첨단 이기를 향유한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였기 때문에 로마총독의 관저가 여기 있었다.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 총독도 이곳에 상주하였고 유월절 같은 큰 명절에만 예루살렘을 잠깐씩 다녀갔다. 극장, 원형경기장,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전차경기장,

지도를 펼쳐놓고 메소포타미아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보자!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는 말은 희랍어로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인데 그 두 강은 아시다시피 티그리스강(Tigris)과 유프라테스강(Euphrates)을 지칭한다. 바그다드는 이 두 강이 가장 가깝게 오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메포소타미아는 현재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에 걸쳐 있다.

로마에서 직접 가져온 대리석으로 지은 카이사레아 목욕탕의 일부. 요즈음의 감각으로 보아도 탁월한 건축물이다.
우리는 예수의 활동지인 갈릴리(Galilee) 하면, 이상하게도 옛 강원도 ‘감자바위동네’와 같은 인상을 지니기 쉽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후대 초기기독교의 기술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 중심의 가치관을 지닌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설화(Passion Narrative) 자체가 갈릴리 시골에서 놀던 촌사람 예수가 대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어떤 직선적 시간라인을 그리고 있고, 예수복음의 핵심인 수난이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요한복음은 이런 직선적 시간라인을 파괴하는 성격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보다 리얼하게 생각해보면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본거지는 갈릴리이지 결코 예루살렘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오히려 그의 생애에서 매우 마이너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해프닝의 배경일 뿐이다.
예루살렘성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면 갈릴리는 화려한 성전건물도 없는 초라한 시골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지역 문명의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였다.
이스라엘 문명도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도 최근 이라크전쟁의 집중 피폭지 중 하나였던 바스라 항구 근처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유프라테스 상류지역인 하란(Haran)평야에서 살다가 세겜, 벧엘을 거쳐 이집트로 갔다가 브엘세바에 정착한 인물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갈릴리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장성하여 예수운동을 펼쳤다.
그 갈릴리는 남쪽의 유대와는 비교적 격절된 문명지였으며 그 아이덴티티는 역사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바빌론, 소아시아문명권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더구나 예수가 태어나기 3세기 전에는 알렉산더 대제가 이 지역을 헬라화하면서 이 지역은 헬레니즘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갈릴리바다 주변에도 헬라식 폴리스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것은 페니키아, 남부 시리아, 데카폴리스(Decapolis, 성서 이름은 ‘데가볼리’인데, 갈릴리바다 동쪽으로 형성된 10개의 희랍식 폴리스도시를 말한다), 북부 팔레스타인 지중해 해안도시들과 연계를 이루고 있었다.
극장, 학교, 스타디움 경기장, 목욕탕, 주랑 있는 아고라(시장) 등등의 헬라화된 도시 풍경은 갈릴리 지역의 다반사였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극장을 가거나 목욕을 엔조이하거나 하는 장면이 안 나오기 때문에, 그가 비교적 토착적 하층민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지만, 예수가 산 문명의 환경과 지적 풍토는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 있어서 최첨단의 개방적 분위기였다.

갈릴리는 우선 인종적으로 복잡했으며 언어도 유대지역과는 달랐다.
따라서 이방인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북쪽의 소아시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트랜스요르단, 다마스쿠스 지역과 남쪽의 사마리아, 유대 지역의 완충지대였기에 예루살렘에 대한 예속감이 없었다.
갈릴리에는 수도도 없었고, 왕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으며, 제사장들의 하이어라키도 없었다.
예수가 살던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로마 압정의 세금착취가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어떤 초월신이나 왕에 대한 충성심이란 갈릴리 사람들의 덕성이 아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소피스트들과 같은 헬라화된 지식인들이 대중운동을 리드하고, 많은 코이노니아이(koinoniai) 소규모 친목단체들이 활약하고, 다양한 희랍철학 유파사상과 지중해문명권의 모든 신화적 사상의 홍류가 휩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라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사상운동가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비옥한 하란평야 위로 유프라테스 상류지역, 지금은 터키에 속해 있지만 우르파(Urfa)라는 매력적인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예로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 터키 지역)와 북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교통요지로서, BC 14세기 히타이트에 멸망되기 이전에는 후리안 왕조의 수도로서 독자적인 고문명의 정체성이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지니는 오스로외네왕국(Osrhone)이 되었고 그 수도가 에데사(Edessa)였는데, 현재의 우르파가 바로 에데사인 것이다.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50년까지 에데사를 다스린 왕이 아브가르 우카마(Abgar Ukkama)였는데,
그의 통치기간이 예수의 생애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아브가르왕과 예수의 관계에 대하여 최초의 기독교 교회사가인 비숍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ia,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는 그의 유명한 『교회사』(The Ecclesiastical History, AD 312~324 집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의 기적을 듣게 된 아브가르왕은 예수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고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왕은 예수에게 자신의 고향을 안전한 거처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자기를 간절히 소망한 아브가르왕의 믿음을 축복하였으나,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왕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아브가르왕은 다시 편지를 보낸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에데사로 와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고쳐줄 것을 편지로 간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도마라고 불리는 유다’가 72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를 에데사로 보내 아브가르왕과 많은 백성들을 고친 후, 모든 거주민들에게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소기천, 『예수말씀복음서 Q개론』 참고).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적인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이야기들로부터 우리는 역사적 정황을 어떻게 추론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은 비록 픽션 같은 야사일지라도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에데사야말로 인류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기독교국가(the earliest Christian state)라는 사실이다. 2세기 말부터는 에데사의 왕들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에데사왕국이야말로 시리아어로 된 초기기독교 문헌의 생산지였던 것이다.
여기 유세비우스의 기록 중에 중요한 사실은 ‘도마라고 불리는 유다’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 작가 아루노비우스가 저술한 『이방민족사』(Adversus Gentes)에 의하면 도마는 직접 에데사로 갔다.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참고). 그는 바로 도마복음서의 저자였던 것이다.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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