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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의 이야기

허연소 2008. 4. 5. 03:48
제목 없음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20세기 전반의 미술사는 추상 미술을 제외하면
마티스와 피카소로 요약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추상 미술에 대한 극단적 혐오와 과거의 전통 미술을
  현대의 현대의 삶 속에서 되살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12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동지 의식을 심어 주었다.
그들은 모든 비평가를 철저히 무시했으나 상호간의 비평은 오히려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비평 또는 지지는 암호처럼 화면을 통해서만 표현되었는데,
  그런 응답이 때로는 10년, 20년이 걸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고의적인 왜곡이나 무시 자체가 응답이기도 했다.

1915년 마티스는 <금붕어와 팔레트>에서 사물의 단순화, 화면의 분산 등으로
큐비즘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 몇 달 뒤 화상을 방문한 마티스는
거기에서 피카소의 최근작 <광대>와 <초록의 정물>을 보았다.


애매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광대>를 바라보던 마티스는
  드디어 "지금까지 피카소가 그린 것 중 가장 뛰어난 그림"이라고 말하며
덧붙여 "내 <금붕어>를 그가 드디어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 그림 <주홍색 작업실>에 대한 언급인 것 같은 <초록의 정물>은 아름답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림이다"라고 일축해 버렸다.




마티스의 <석고 흉상과 정물>에 대해               피카소는 그로부터 16년 뒤
                                                                <정물: 흉상과 그릇, 팔레트>에서 그 모티프는
                                                                  물론 전체적 구성 과 색상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마티스는 그의 스승 세잔이 쿠르베의 지대한 영향과 그로 인한 많은 제한에서
  벗어나려 했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론에 대해 거의 강박관념을 가졌던 마티스는
  세잔의 격언이었던 "마스터의 영향을 경계하라"는 말을 늘 인용하면서
  마스터의 기법을 모방할 때 그 사람을 질식시키고 무력하게 보이는 보이지 않는 장애막이
  그 부위에 형성되기에, 이 점은 아무리 여러번 강조해도 모자란다고 했다.


마티스는 자신의 길을 찾는 방편으로 고안해 낸 것이  
서구 문화와 미술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의 원시적 요소와 고대 문명의 신화를 통한 탐색의 길이었다.

피카소 역시 '영향'을 경계했다.
때로는 고의적으로 마티스의 그림을 그릇된 방향으로 해석했고
  그런 반항적 자세와 게임은 그를 '영향'에 대한 불안과 초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아폴리네르 시집 <야수>에 그린 피카소의 삽화는
그 1년 전 출판된 마티스의 석판화 시리즈에 대한 도전으로 보여진다.  
몇 안되는 성으로 단숨에 그려진 듯한 마티스의 재능에 피카소 자신은
단 한 선으로 어떤 형태도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말하듯
끊어지지 않는 선으로 야수들의 형태를 포착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과 관심을 보였던 그들은  
그림에 임하는 상반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마티스가 지각과 감성으로 그렸다면 피카소는 날카로운 지성과 비판, 분석으로 그렸다.
예를 들어 마티스가 생굴 그림을 그릴 때는 끝날 때까지  
수시로 방금 껍질을 깐 싱싱한 생굴을 바꾸어가며 그렸다.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생굴의 모양새가 아니라 그 싱싱함이 돋구어주는 식욕이었다.
물고기를 그릴 때는 방금 어부가 그물망에서 모래사장 위에 쏟아놓은 물고기들의 꿈틀거리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물을 뿌려가며 그렸다.
마티스는 인체를 그릴 때도 마찬가지로 모델의 모습보다는
  외형에서 전해받는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고자 했다.

반면 피카소의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눈 앞의 대상에서 받은 인상을 일단 어떤 암호나 은유 등으로 바꾼 다음
실체의 모델을 떠나 그 머릿 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그렸다. 이런 점은 특히 초상화에서 두드러진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기 전 모델을 뚫어지게 바라본 후엔
  모델 없이 다양한 상징적 표현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25세의 피카소가 미국의 여류 작가 거투루드 스타인의 초상을 그릴 때 일이다
피카소는 바쁜 모델을 몇 달을 않혀놓고 작업 했으나  
도무지 그녀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아 모두 지워버리고 스페인으로 휴가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여행 중 우연히 본 고대 조각품에서 드디어 스타인의 얼굴을 보았다.  
파리로 돌아온 즉시 그는 모델 없이 그녀의 얼굴을 단숨에 그렸는데
그것은 하나의 일그러진 마스크였다.  
그 후부터 피카소는 모델로부터 자유로워졌고 그의 은유적 시각 언어가 개발되기 시작하여
  <아비뇽의 처녀들> 이후 큐비즘 화면에서 차츰 그의 '독자적 사인 언어'를 발전시켰다.  

피카소는 사실주의를 떠나지 않는 화면 안에서
적절한 공간 배치를 통해 그런 사인 언어를 실현했다.
그림에서 얼굴을 이루는 요소들인 눈, 코, 입, 귀 등을 따로 떼어 원래의 위치에서  
멋대로 다시 배치를 해 놓아도 그것은 역시 하나의 얼굴로 읽혀진다.


1912년 큐비즘이야말로 가장 앞선 현대 미술로 찬양 받으면서 피카소가 그 기수로 군림했다.
뒷전으로 밀린 마티스는 몹시 심기가 상해 모로코 여행을 다녀온 뒤
그 역시 <피아노 레슨> 등에서 큐비즘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큐비즘 해석의 다양성과 추상적 성격에 위험과 거부감을 느껴  
<피아노 레슨>을 다시 그린 <음악 레슨>으로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선언했다.  

그 후 10여년 동안 피카소와의 접촉과 대화를 피하면서  
자신의 풍부한 장식적 요소의 기능과 가능성에 몰두했다.


피카소 <미노타우로스>- 마티스 무희들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신화적 괴물로 그와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마티스 <유로파의 유괴>- 피카소의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응수로 보이는 이 그림에서
                                     마티스는 신화의 광폭적인 황소를 오히려 순해빠진 양처럼
                                     묘사했다.(이 그림을 위한 3천여 장의 스케치가 당시 그의 화실을
                                     덮고 있었다고 한다.



피카소가 20세기 미술의 영웅으로 환대받는 동안 마티스는 야수파 시절의 초기 작품만언급되어  
그 명성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절정으로 치닫는 피카소 그늘 아래서
조용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마티스의 신작들은 피카소에게만 급급한 평론가들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카소만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마티스 화면의 작은 변화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도전과 함께 일련의 기대하지 않았던 미국으로부터의 벽화 주문과  
카네기 대상 수상 등 대대적인 마티스 회고전은 그에게 다시 왕성한 창의력을 되찾아 주었다.
피카소도 이에 질세라 서둘러 최근작 전시를 했으나 "마티스의 근사치에 불과하다"라는  
악평과 함께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나 떠들썩했던 마티스의 회고전은
그가 사실주의 화면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큐비즘의 반발에서 나온 원동력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피카소의 예찬을 동반한 결과였다



마티스의 작품  <티아레>
    여인의 얼굴을 이루는 형태를 여기저기서 끌어와 콜라주같이 붙여 다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피카소의 큐비즘 기법을 인용하고 있다.




피카소의 <여인의 흉상>
    마티스가 자신의 큐비즘을 인용한 점을 강조했다.



마티스의 <모로코 사람들>- 이례적으로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그림에서 입체파의 수법을  
                                        시도하고 그 시각적 이미지에 불연속 효과를 투사했다.
                                        마티스는 이 그림의 세 부분 사이에 명목상의 이음새를 잘라버리
                                        고 각 부분을 공간적으로 불확실한 검정색 영역에 걸어놓았다.
                                        여기서 하나의 장식면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마티스가 뒤늦게
                                        입체파의 개념에 일부나마 동화했던 사실을 나타내주는 고안이다


  2차 대전 당시 피카소와 마티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에게 주어진 많은 망명 기회를
단호히 거절한 점이다.



피카소의 <금발의 여인>을 염두에 두고 그린 마티스의 <꿈>


1944년 전쟁이 끝나고 두 화가는 프랑스의 국보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75세의 쇠약한 마티스의 조용한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었으나 63세의 피카소는 파리의 스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해 파리의 권위를 자랑하는 살롱에서는
<해방전>이란 이름으로 전쟁 중 피카소의 작품을 특별전으로 전시해 줄 정도였다.
또한 때마침 피카소가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소식은 전쟁 뉴스를 밀어제치고
전 신문 일면에 보도되었고 그 다음날 문을 연 피카소 전시장에서는 그의 그림을 떼는  
데모 소동까지 벌어졌다.

건강 관계로 파리의 피카소 전시를 가볼 수 없었던 니스의 마티스는 보는 사람마다 잡고  
그 전시에 관해 물었다.
특히 피카소의 공산당 입적 동기에 무척 궁금해했다.
사실 피카소는 공산당의 막강한 위력에 넘어간 셈이었고 그는 그런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티스의 입장을 부러워했다.

그해 있었던 런던의 미술관에서의 피카소. 마티스 2인전에 대해 마티스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그래, 한쪽은 내 그림, 그 반대편은 피카소 그림으로 진열되겠지.
그건 마치 그 지랄같은 피카소와 한 지붕 아래 사는 것과 다름없으니!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득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은 얼마나 고요하고 잔잔해 보일지!
정의가 항상 이긴다고 믿지만, 못 믿을 게 사람들이야.
그러나 그가 과연 옳다면........................................?"
이런 마티스의 불안은 명중했다.
피카소보다 더 많은 그림을 전시했지만 마티스의 그림은 완전히 빛을 잃었으며 언론조차  
피카소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마티스는 파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의 전쟁 중 작품이 호화판 화보로 출판되었고, 전후 프랑스의 가장 핵심적 화랑의 개관 전시에
그 첫번 화가로 마티스가 선정되었다.
니스에서 병중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마티스는 그런 와중에도 철저히 전시 계획을 관리했다.
특히 보기에는 너무나 쉽게 그려진 것 같은 그의 그림들이 완성되기까지의 스케치와 습작 등
단계를 기록한 사진들을 함께 전시했다.
이 전시는 피카소에게 깊은 감명과 영향을 주었고 그의 투우 석판화 시리즈에 즉시 반영되었다.

마티스가 방스 성당의 벽화를 끝낼 즈음 피카소 역시 이제는 프랑스 공산당의 소유가 된 12세기  
낡은 옛 성당 의 벽화를 의뢰받았다.
<게르니카>보다 훨씬 방대한 벽면에 부담을 느낀 피카소는
"만일 내가 니스에 있다면 매일 아침 마티스에게 달려갈거야.
  그리고 그에게 방스 성당 벽화 작업 중이었을 때의 심경을 물어보겠지................
  그러나 백 평방미터 정도의 벽면때문에 파리에서 니스로 달려갈 수도 없고.............."

1954년 마티스는 8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마티스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 피카소 예술의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으며
그의 경쟁자이자 그를 가장 잘 이해했던  단 하나의 친구였다.

마티스의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을 만큼 그를 잃은 피카소의 슬픔은 깊었다.


  

마티스에 대한 안타까운 그리움을 쏟아부은 <캘리포니아 화실>시리즈

출처 : inluce
글쓴이 : 운 통 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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